세상의 오후 세시 이십칠분

PM 3:27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나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가을이 텅비어버려 하늘이 파랗던 날, 평상 위의 고추는 자줏빛으로 햇볕을 머금고 있다. 마침 바람부는 언덕 위에 내 생애를 햇살 아래 마악 널어놓은 참이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은 먼지와 가을 햇살 속으로 눈부시게 소실되고 산맥과 하늘은 까마득해서 전설같은데, 자신의 벗은 몸을 햇빛으로 가린 개울이 산과 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이때는 내 생애 속으로 덜거덕 정차한 세상의 오후 세시 이십칠분.

마침내 세상이 나를 살고 있었다는 것을 눈부신 햇살 아래,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이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살아가기가 힘들었다는 이 나른한 이해(理解)의 아래, 널어논 생애가 뽀송하게 마르고 있다.

세상이 나를 살고 있다는 이 나른한 무화(無化)함 속으로 풍경이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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