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알고리즘과 오욕칠정

세상은 오온1五蘊: 色·受·想·行·識에서 色을 빼면, 의식작용(수상행식)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色(외부의 사물)을 느끼는 사물의 이차성질 또한 관념(識)이다. 결국 우리가 아는 세상은 형성된 관념(識)의 소산2一切唯心所造일 뿐이다. 세상이 불합리한 것은, 우리의 의식이란 것이 코기토적인 관념과 기괴하고도 외설적인 마음(심리)이 마구 뒤섞여 있는 탓이다. 이외에 제3의 알지 못하는 무엇3神이나 영혼 등인가가 있을 수는 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인공지능(AI)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물과 움직임에는 특정한 알고리즘(algorithm)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유전자와 사람의 사유 또한 알고리즘(신의 섭리)에 기반하며, 우주 또한 알고리즘에 기반한 시뮬레이션의 결과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영혼이나 마음 또한 거대한 알고리즘의 산물이라고 한다.

AI 공학자들은 처음에는 로봇의 움직임에서 생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알고리즘 개발하겠다고 달려들었다. 고양이를 예로 들면, 고양이를 인식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고 큰 소리를 치는 순간, 알고리즘으로 포착되지 않는 고양이는 늘 있었고, 이들 예외 앞에서 알고리즘은 오류메시지를 내고 시스템은 처리불능상태를 맞이한다. 이제는 예외에 따른 오류를 데이터의 량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수억장의 고양이 사진을 시스템에 업로드하고, “이것들이 고양이다.”라고 한다. 이제 개별적인 예외를 알고리즘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라는 사태를 수억분의 일(예외/고양이 사진)이라는 무한에 가깝게 수렴시키고, 무한 속에서 출현하는 예외라는 사태를 다시 수억장의 고양이에 대한 학습을 통한 경험치로 부터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로 알고리즘은 변화한다.

구글 딥마인드에서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알파고4AlphaGo : AI가 아니라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라고 되어 있다에 심어넣은 뒤,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량의 바둑 기보(棋譜)를 쏟아붓고 바둑을 학습시킨다. 알파고는 데이터들과 알고리즘의 변주를 통하여 바둑돌의 수와 그 수가 다음 수에 미칠 영향을 다양하게 시뮬라시옹하면서, 승리를 시뮬라크르해 나갔다. 알파고는 2016년 3월에 이세돌 9단과 호선으로 맞붙어 4승 1패로 이긴다.

이제 코기토의 영역을 넘어, 오욕칠정으로 AI를 물들일 수 있을 것인가?

바둑이 알파고에게 가능했다면, 소설과 시 혹은 각종 심리학에 관한 연구보고서들을 쏟아부어 AI에게 감정과 같은 것을 학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전문학을 집어넣는다면, 품위있고 절제된 감정을 보유한 재수없는 AI가 될 것이고, 카톡의 대화를 집어넣는다면 그럭저럭 이 시대의 젊은이와 흡사한 AI가 될 것이다. 만약 심리학에 관한 각종 자료를 입력한다면, 미친 AI를 만날 수도 있다.

‘인류멸망보고서’5임필성, 김지윤 감독작, 2012.04.11 개봉라는 맹랑한 옴니버스 영화를 보았다. 영화 1부에는 로봇 RU-4(출가 후 법명은 인명)가 깨달음을 얻고, 승려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부좌를 틀고 입정에 든 자세나 설법 시 안출해 내는 법문이 너무 그럴 듯해서, 깨달음이란 중생인 사람보다, 마음이 없는 로봇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나라 때의 고불, 조주스님께 한 중이 여쭙는다. “로봇(개)에게도 불성이란 것이 있습니까?” 스님께서는 “없다”고 한다.6趙州和尙 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아픔을 느끼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아픔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중생들에게, 아픔이 무엇이고(苦), 아픔이 어떻게 생기며(集), 아픔의 치유란 무엇이고(滅), 어떻게 아픔을 치유할 것인지(道)를 알려주려고 하셨을 따름이다.

AI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로봇인 인명선사 또한 아픔을 느낄 까닭이 없다. 그런 로봇에게 부처님의 사성제나 깨달음 따위란 무의미하다. 이미 아픔이 없는 탓이다. 희노애락같은 것 역시 로봇에게 필요치 않다.

문제는 자신의 번뇌조차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이, AI도 자신처럼 아파하고 오욕칠정에 물들기를 바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