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 정적이란
음악에서 고요함이란 음이나 소리 사이를 구분하는 도구이다. 그 고요함은 그다지 길지 않다. 가장 긴 온쉼표라고 하더라도, 보통 빠르기 기준으로 정적은 2.6~2.8초에 불과하다.
4분 33초 동안의 정적이란 음악에선 얼마나 긴 것인지…?
어느 관객들에겐 그 정적이 모욕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고, 무료함 탓에 어쩔 수 없이 먼지같은 소음들을 감상하는 것이지만, 건반 위에 손가락 하나도 올려놓을 수 없는 연주자들에게는 그 정적의 무게란 무한한 시간들이 4분 33초에 응결되는 것 같지 않았을까?
4’33”라는 정적을 어떻게 그들은 연주하는 것일가?
정적을 연주하는 법
아래의 악보에 명시되었다시피 연주시간에는 제한이 없다.
4’33”라는 제목이 붙게 된 것은 초연을 한 피아니스 데이비드 튜더가 피아노 뚜껑을 닫고 연 시간이 4분 33초였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이 시간이 듀더의 자의(自意)에 따른 것인지, 임의(任意)에 따른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여튼 이후 4’33”가 제목이 된다. 케이지는 우연성과 불확정성의 음악을 목표로 했다지만, 그 후 연주자들(심지어 교향악단의 지휘자들)은 4분 33초라는 시간에 집착하게 된다.
연주자 X는 연주 당시를 회고한다. “엄청난 시간이 제 마음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알았지요. 그 시간을 객관화하면 엄청 짧을수도 있다는 것을 요. 저는 느끼는 시간과 실재하는 시간 사이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은 결코 양으로 따질 성질이 아니었어요. 마침내 4분 33초의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말았지요.” 그의 연주는 6분을 초과했다고 한다.
이 4’33”는 어느 악기도 연주하지 않지만,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에서도 연주한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트랜스 포스터는 33초에 불과한 1악장(tacet)이 끝나자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고 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는 3분 30초 만에 연주를 마쳤는데, 관객 중 일부는 “과도한 루바토1박자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하는 연주법이나 창법는 좋지 않다”며 투덜댔다고 한다.
4분 33초를 맞추기 위한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시계나 메트로놈을 본다던지, 아니면 속으로 4분 33초를 세거나, 비슷한 길이를 가진 드뷔시의 꿈(rêverie) 따위를 마음 속으로 연주하면서 시간을 재어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음악을 그들이 어떻게 연주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정적을 감상하는 법
이 음악의 감상법 또한 규정된 것이 없다. 존 케이지는 정말로 정적이나 고요와 같은 것을 연주하려고 완벽한 흡음실을 찾았다고 한다. 거기에서도 그는 자신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명이나 심장박동) 때문에, 완벽한 정적을 찾지 못했다. 그런 즉 그의 음악은 완벽한 정적을, 그 고요함을 우리에게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이 음악을 작곡하기 전인 1947년 바서 칼리지에서 “한 편의 끊임없는 정적을 작곡하고, 그것을 Muzak에 판다. 3분 또는 4분 30초의 길이로 통조림 음악2‘canned’ music : 공연장에서 연주되기 보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엘리베이터나 작은 공간에서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TV 쇼에서 웃음이나 박수,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기 위해 미리 녹음된 음악이나 소리 따위를 말한다에 적합하고, 제목은 ‘침묵의 기도’가 될 것이다. 어느 꽃의 색과 모습 그리고 향기처럼 매혹적인 것을 만들어내려는 단일한 의도에서 시작하지만, 마침내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세계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3to compose a piece of uninterrupted silence and sell it to Muzak Co. It will be three or four-and-a-half minutes long—those being the standard lengths of “canned” music and its title will be Silent Prayer. It will open with a single idea which I will attempt to make as seductive as the color and shape and fragrance of a flower. The ending will approach imperceptibility.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초연 때는 우드스탁 야외공연장을 둘러 싼 소음들과 낮은 속삭임 따위를 감상했을 것이지만, 시간이 가고 세월이 지날수록 청중들은 자신들이 소음을 연주하고(만들어내고) 즐기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을 거북스럽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 불확정적이고 우연한 음악이 지닌 불가피한 특성인 것이다.
소리없는 음악이 가져온 것
콩나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악보 탓에, 누구라도, 어떤 방식으로도, 얼마만큼의 시간이라도, 악보에 명시된대로 3번의 정적(tacet)을 유지하기만 하면, 4’33”를 연주한 것이 된다. 물론 여기에도 명연주와 형편없는 연주가 있을 수 있다. 얼마나 멋지게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느냐, 어떤 포즈로 바이올린을 턱에 괸 채 무대에 서 있느냐 하는 시각적 연주가 한 요소가 될 수 있고, 청중들의 정적에 대한 반응과 연주장의 소음 따위, 테이싯(tacet) 시간의 변주 등등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 음악에는 소변기를 ‘샘’이라고 전시했던 마르셀 뒤샹의 다다이즘적인 전복이 있다. 따라서 개념미술처럼 “이것도 음악이다”라는 개념(관념)이 음향적, 기술적, 물질적인 것보다 선행한다
작곡된 악보가 있는 만큼 이 음악도 저작권이 있다. 케이지가 사망한 70년 뒤인 2062년까지 저작권이 유효하다고 한다. 그래서 4분 33초 동안 조용히 침묵하고 있으면 저작권료를 징수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애플뮤직에도 많은 4’33”가 올라와 있다. 연주시간이 3분 40초이며, 4분 37초 등 연주자마다 다양하다. 들어보면 정적보다는 소음들로 채워져 있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 것은 희미하여 들릴 듯 말듯하다.
존 케이지의 4’33”의 악보는 다음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