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 모순의 해석법
모순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변증법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지젝(Slavoj Žižek)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인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오랑캐, 유태인)은 모든 동일성(우리 민족, 독일 민족)의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고 한다.
이 명제를 통하여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은 언제나 불일치로 분해되며, 이 불일치야말로 그 관념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필연성임을 주장한다고 한다.
- 테제(these, 定立) :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
- 안티테제(antithese, 反定立) : 타이타닉은 형편없다. — ‘테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역할
- 종합(synthese) :
- 일반적인 종합(동일성의 변증법) :
대다수의 영화는 훌륭하다. - 지젝식의 종합(차이의 변증법) : 모든 영화가 훌륭한 것은 ‘타이타닉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 일반적인 종합(동일성의 변증법) :
도대체 무슨 근거로 모든 영화가 훌륭하다는 것이냐? 그럼 타이타닉을 봐라. 다른 영화들은 타이타닉처럼 형편없지 않다.
아무런 차이와 갈등이 없는 일반적인 종합에 대하여, 지젝식 종합의 진실은 바로 모순(antithese) 속에 있다. 형편없는 영화(타이타닉)라는 차이를 모른다면, 어떤 영화가 훌륭한 지 변별하지 못한다. 안티테제(모순)는 규칙(모든 영화는 훌륭하다)을 입증하는 예외다. (형편없다는) 안티테제가 없다면, (훌륭하다는) 테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안티테제는 테제에서 분기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테제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하며, 테제가 존립할 수 있는 근거다.
즉, 오랑캐나 유태인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모순)가 없다면, 우리 민족이나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라는 자기 인식 또한 없다. 따라서 히틀러나 독재정권이야말로 유태인이나 빨갱이를 필요로 한다. 유태인은 실체가 있는 게르만 민족(자기동일성) 외부의 존재이지만, 해방정국에서 한국전쟁을 지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빨갱이는 우리 내부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데도 살의(殺意)에 가까운 증오의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이런 동일성의 내적 조건을 규정하는 예외에 의한 종합이라는 방식말고, 제3의 방식이라는 것도 있다.
- 테제 : 당신을 사랑한다.(진실)
- 안티테제 : 당신을 미워한다.(부인)
- 종합 : 사랑한다는 진실이 자신을 압도하여, 부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이와 같은 부인은 헤겔의 ‘동일성의 변증법’이나 지젝의 ‘차이의 변증법’을 만들어 내기 위한 안티테제가 아니다. 미워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쾌락이 포개져 있는 ‘향락의 변증법’을 그려낸다.
사랑은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다.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외줄기의 감정이 아니다. 여러 타래의 복합적인 감정과 본능 그리고 성적 충동 따위가 DNA처럼 꼬여있는 법이다. 사랑에 빠지면,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또 자신 속에서 분출하려는 외설적인 욕망을 마주한다.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견딜 수 없는 욕망에 다리를 비비꼬지만, 수치심 때문에 드러낼 수 없다. 상대를 더듬고, 숨막힐 정도로 껴안고, 입 맞추고 깨물어주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지같은 욕망을 불러 일으킨 상대 또한 자신과 같은 욕망(사랑)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뜨거운지, 차가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자니 미칠 것 같고,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불러일으킨 그/그녀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것을 넘어 그녀/그를 미워할 수도 있다.
사랑(욕망)이 강렬할수록, 부인은 더욱 강한 법이다. 그래서 못견디게 사랑했던 상대방의 느닷없는 첫 키스가 (부끄럽게도 자신이 너무 간절히 원했던 탓에) 충격적이라서 상대방을 밀쳐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의 중핵에 다다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순수하며 또한 외설적인, 그래서 벌거벗은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상대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