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5. 허울
“환상이란 이런 허울(semblance)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안쪽의 실재를 은폐하고 있는 가면이 아니라, 가면 뒤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착각이다” 1HOW TO READ 라캉, 177쪽라고 지젝은 말한다. 만약 그것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숨기기 위한 가면이라면 그것은 허울이 아닌 것인가?
하지만 내가 허울이라고 부르는 것은 라캉의 ‘정초적 말'(founding word)과 관련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타자(모르는 사람), 그 불가해한 심연을 맞이한다. 그 심연의 실체는 타자성이 지닌 기괴함과 어두움으로 물들어 있다. “이 남자/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만큼 자신 속의 그 괴물과 같은 힘으로 나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여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애인/친구이다.”라고 선포한다. 이러한 정초적인 말을 통하여 서로 간의 상징적 동일성을 구성하고 서로 공언된 존재(애인/친구)를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안다고 하며, 타자가 지닌 불가해한 심연을 회피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허울이란 이러한 ‘정초적 말’과 같은 상호 간에 아무런 선언적 의례없이, 홀로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립하는 것 중 하나를 말한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자기 혼자 남몰래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짝사랑일테지만, 터무니없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치장할 경우, 그것이야말로 허울이다. 짝사랑의 경우 타자성은 아름다운 환상 2단테의 뻬아트리체나 짝사랑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환상이다에 의하여 가려지지만, 허울의 경우 안에 알지 못할 뭔가 3정초적 말로 선언되지 않았기에 무정형의 기괴함으로 뒤덮힌 타자라는 괴물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착각 탓에 마주하기가 더욱 무서울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