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그리고 후기
그런데 말이야…
인간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
<섬 그늘에서…>는 나이 스물 때, 한번 스쳐 지났던 노량을 무대로 썼다.
그곳에 대한 기억은 단 삼십초 정도다.
남해대교 밑으로 내륙의 끝자락을 달리는 도로는 바다로 흘러드는 듯 했고, 바닷물은 바람 만 불어도 도로에 넘칠 듯 찰랑거렸다. 도로의 끝으로 민가인지 술집인지 모를 집들이 도로와 바다 사이로 있었다. 집들은 바다 쪽으로 발을 담고 있었다.
저녁 때에 잦아드는 감상인지 몰라도 수국(水國)에 피어오르는 가난함이 오래된 흑백사진의 추억처럼 밀려왔고, 그 사이로 보이는 광양만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오래 전 그곳에서 노량해전이 벌어졌고 4만9천명이 다치거나 죽었다고 믿을 수 없는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나이 스물에 본 해풍과 가난에 찌든 집들의 모습은 늘 내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남해대교를 건너거나 섬진강을 지날 즈음에 노량을 가보아야지 하면서도 다시 그 길을 지나지 못했다.
나는 다시 그곳으로 내려갔다. 하동을 지나 남해대교 앞에 내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곳, 노량으로 내려갔다.
노을이 아름다운 곳은 늘 낮은 곳이다. 서울에서 가장 낮은 합정동의 노을처럼,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노량에서 바라보는 노을도 처참할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읍내라고 불리우는 하동은 무수히 스쳐지났지만, 한번도 차에서 내려본 적은 없는 곳이다. 그러니 스물이라는 꽃물 든 나이로 연애편지를 그곳에서 이른바 애인이라는 종족에게 보낸 적은 없는 것 같다. 섬진강 가에서 쓴 편지는 더 먼 곳으로 달려가 어느 우체국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만 이야기 속에서 아잉을 만나고 말았다. 잠시 하루 밤 정도 만 거기서 머문 후, 남해의 상주나 미조포구 같은 곳으로 떠나 창선연육교를 지나 서울로 돌아오려고 했다.
거기에서 아잉을 만났고, 가난과 외로움에 젖어 그만 몇 년을 썩는다. 그래서 3~4편으로 끝날 이야기는 11편까지 늘어졌다. 끝내려고 했는데, 아잉이 가기 싫다고 버티는 바람에 길어졌다.
이야기가 끝나고, 김우진이 서울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았는지 아닌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그것은 그 아저씨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나란 놈은 인간이 되기에는 영 싹수가 글러먹은 놈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외로움과 가난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진리가 없어서 자살을 하거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자유? 때론 그것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살다보면 자유란 늘 불가능한 것이다. 민주를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그것은 말 뿐이다. 민주가 없던 예전에는 임금을 위해서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어야 폼이 난다고 생각한다.
돈? 그것은 좀 맞는 것 같다. 돈이 없으면 죽거나 인간같이 못산다. 그런데 돈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그런데 인간의 조건으로 외로움과 가난을 생각한다.
그것 둘 때문에 사람들은 죽고 살기 때문이다.
한번도 외롭다거나,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인간이 되려면 아직도 먼 것 같다.
2007/07/02
…그리고 또 다른 후기
우리나라에 旌善 이씨(2000년 인구 : 3,657명)와 花山 이씨(2000년 인구 :1,775명)가 있다. 이 두 성씨는 본질적으로 같은 이씨다. 정선 이씨는 大越(베트남) 李왕조(1009~1225)의 왕자인 이양혼(李陽焜)에서 시작한다. 이양혼은 5대 신종(이양환)의 동생으로 왕위를 다투다가 고려로 망명을 한다. 양혼의 6세손이 무신정권 때의 이의민(李義旼)으로 고려를 14년간이나 실질적 지배를 한 적이 있다. 이후 대월 이왕조의 7대 고종의 동생인 이용상(李龍祥)이 이왕조가 진씨에 의해 무너지는 상황에서 고려로 도주, 황해도 화산에 정착한다. 용상의 후예는 몽고의 침입 시 잘 싸워 화산군으로 봉해진다. 그러니 우리의 월남과의 교류는 깊고도 오래되었다.
국민학교라는 곳에 들어가서 학교에서 배운 노래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맹호부대 용사들아~ 그런 것이다. 입학을 하고 난 후 월남파병이 본격 시작되었고, 나의 어린 시절 베트콩은 파리처럼 죽여야 당연한 것, 그것도 참새보다 더 쉽게 에무완 또는 카빈 소총으로 쏘아 맞추는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4~5학년이 되어 위문편지를 쓸 수 있을 때, 외삼촌, 아저씨들이 파병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위문편지를 썼다.
“삼촌 베트콩 많이 죽였어요? 백명 이백명 마구 죽여서 훈장받아 돌아오세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총알이 딱쿵 딱쿵 빗발치는 사선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지를, 나는, 어려서 정말로 몰랐다.
월남파병은 정말로 창피한 일이다. 용병이라고 파병을 폄하했지만, 내가 볼 땐 인신매매다. 용병은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전장에 뛰어드는 일이지만, 월남파병은 도덕성없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거짓된 전장에 쏟아부은 것이다. 군바리 정권은 우리의 젊은 목숨을 남십자성이 뜨는 열대, 소련제 아카보 소총 소리가 딱쿵거리고, 미제 소이탄이 밀림을 깡그리 튀겨버리는 그 곳으로 보냈다. 그렇게 미국에 아첨하며 정권을 유지했고, 젊은 피 값은 따로 챙겼다.
1964.8월 의무중대 파견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연인원 312,853명(최대 5만명)을 보냈다. 이 중 5천명이 사망했고, 참전자 중 2만명 정도가 고엽제의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많은 상이군병이 발생했다.
이때 미국으로부터 받은 한국군의 봉급은 미군의 1/3수준으로 30만의 파병군이 받은 수당은 236백만달러, 이 중 195백만달러가 국내로 유입되어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투입된다. 1968.2월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고 40년후인 2008.2월 고속도로를 공사한 현대건설의 주역인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 뿐 아니라, 1966년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131명)을 필두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자행되었고, 콩까이(아가씨) 따 먹는 것은 간식이라며 베트남 처녀를 보고 급히 탄띠를 풀기 위해 일어섰다가 AK-47의 약실을 벗어난 총탄에 절명하기도 했다. 갈보 중에서도 양갈보가 제일로 더럽다면서도, 무책임하게 라이따이한들을 싸질러놓고, 베트남에서 철군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농촌이나 어촌 마을의 나이든 총각들이 호치민행 비행기를 탄다. 그들은 하루에 수십명의 콩까이의 선을 보고 골라잡아 그 날로 호텔에 신방을 차린 후, 다음 날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탐으로써 면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나라로 남편만 믿고 무작정 따라온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의 운명은 또 어떤지 모른다.
임진왜란이 끝나는 무술년 음력 11월 이순신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적들을, 끝끝내 막아서고 끝내 쫓아가 왜선 500척 중 450척을 격침시킨다. 거기가 남해와 하동이 마주하는, 남해대교의 아래 노량이다. 이순신은 남해의 서북단, 관음포에서 노을을 마주하고 죽는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은 그냥 대마도를 지나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는 부산과 사천, 남해의 왜군들을 기어이 노량으로 집결시키고 이순신과 마주하게 했을까?
왜 이순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날 것에 들떠 있는 저들을, 적들로 끝끝내 죽여야만 했을까?
충정이었을까? 아들 면이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무엇이었을까?
아아 어질지 못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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